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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붓다/비교종교

다종교 사회의 필연적 문제

by 자광 2009. 11. 8.
지금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각각 분명한 사회적 영향력으로서 존재하는 다종교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장점과 문제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먼저 다종교 사회는 문화적인 은혜와 기회의 현장이다. 지금까지 축적해 온 인류의 문화 유산 가운데서 종교 문화가 차지하는 양은 압도적이다. 종교 문화가 인류의 삶에 갖는 중요함 또한 결코 작지 않다. 종교는 인간의 탄생과 삶과 죽음은 물론 그 이전과 이후까지 걸치는 인생관과 세계관을 제시한다.

종교는 인간의 모든 가치관을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우리가 만일 단일 종교 사회에 산다면 다양한 종교 문화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박탈당하고 말 것이다. 반면에 다종교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중요한 인류의 문화 유산을 그만큼 폭넓게 누릴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한국 사람들은 동아시아 사람들의 삶을 지도해 온 유교 불교 도교는 물론 서구 문명을 형성한 두 뿌리 중의 하나인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마음대로 선택하여 누리거나 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이슬람교까지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종교 이외에는 접촉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이슬람 사회를 생각해 보면 그들의 문화 선택의 폭이 얼마나 한정된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다종교 사회는 다양한 인류 문화의 유산을 풍부하게 향유할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반면에 다종교 사회는 하나의 위기일 수도 있다.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된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절대시한다. 종교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종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이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종교인은 누구나 자신의 신앙에 대해 절대적 확신과 함께 그것을 남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종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이란 자신의 신앙을 절대시 혹은 최고시하는 반면 남의 신앙은 오류 혹은 열등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성격을 말한다. 종교는 신앙을 결코 기호(嗜好)의 문제로 남겨 두지 않는다. 음식의 경우라면 된장을 좋아할 수도 있고 치즈를 좋아할 수도 있다. 또한 상대방의 기호품에 대한 우열을 논할 일도 없다. 그러나 신앙이란 그렇지 않다. 신앙이란 기호가 아니라 목숨을 걸만큼 절실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신앙이란 세계관과 인생관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불자나 기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불자나 기독자가 아닌 사람은 불행한 사람 혹은 적어도 덜 행복한 사람이다. 불자나 기독자들은 자신이 그런 신앙을 가짐으로써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 분명할 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종교인이 자신의 믿음을 남에게 적극적으로 권면(勸勉)하지 않는다면 그는 덜 성실한 종교인이다. 사랑이나 자비심이 부족한 사람을 성실한 기독자나 불자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일 붓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려 들지 않는 불자라면 그는 자비심이 넘치는 불자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예수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전하려 하지 않는 기독자라면 그는 사랑이 충만한 기독자는 아니다. 성실한 종교인은 자기 혼자만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적극적이고 성실한 종교인은 자신의 신앙을 남에게 반드시 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태도, 즉 종교적 제국주의의 태도를 갖는다. 문제는 모든 종교인의 이러한 "태도"는 같은 반면에, 전달하고자 하는 그 "내용"은 다르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내용을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려고 할 경우 긴장과 갈등은 예상되는 필연적 과정이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배타적 독선주의의 요소가 없을 수 없다. 종교적 신앙은 본질적으로 남녀간의 애정 관계처럼 어느 정도 배타적인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간의 갈등과 알력이 종족이나 지역 공동체의 반목과 겹치게 될 때, 그것은 심각한 분쟁이나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되는 것이다.

다종교 사회의 갈등과 알력은 동서양의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거의 예외 없이 존재했었다. 특히 사회적 영향력을 한 종교가 독점하지 못하고 여러 종교가 나누어 갖게 될 때 종교간의 알력과 반목의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다종교 사회의 문제점은 특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유일신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이러한 종교들은 자신의 것을 절대시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남달리 더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사회는 기독교가 소개되면서 이러한 긴장과 갈등을 심각하게 겪어 왔다. 한국에서 다종교 상황이 야기(惹起)하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서로 엇비슷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문제일 것이다.

한국의 다종교 상황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사실 논리적 귀결을 기대한다면, 한국 사회는 다종교 상황의 문제점이 그 어느 사회보다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할만큼 전형적인 다종교 사회이고, 다종교 현상이 심하면 심할수록 종교간의 알력과 반목도 증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다종교 사회의 전범(典範)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은 극단적인 종교 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이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그러나 주요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 사회는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 민족에 의해 형성된 국가로서 강력한 사회 통합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단위 공동체간에 분쟁의 소지가 적다. 종교 분쟁이 심각한 사회와 달리 한국은 종족이나 지역 공동체가 종교 공동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남북한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심각한 분쟁을 겪고 있지만, 양 진영이 종교를 한 가지씩 나누어 갖고 있지는 않다.

한 쪽에서는 종교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있고 다른 한 쪽 역시 하나의 종교가 압도하고 있지 못하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지만, 만일 남북한이 각각 하나씩의 신앙을 나누어 가진 채 대립해 있다면 분쟁의 정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이며 통일을 향한 전망도 그만큼 어두울 것임에 틀림없다.

두 번째 이유로는 한국의 문화나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이 분열이나 개성보다는 통합과 총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체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비롯해서 인간 관계를 포함하는 모든 사회 생활을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에 따르고 있다. 특히 조상 제사는 전적으로 유교의 것이지만 대다수의 한국인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고수하고자 하는 기독자들조차 한국에서는 조상 제사를 점차 수용해 가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기독자를 포함하는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인생을 무상하게 여기거나 윤회나 인과응보를 믿는 등, 인생관이나 가치관에서 다분히 불교적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자신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던 간에 합리적 이성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들에 맞닥뜨리게 되거나 일생의 중요 고비에 서면 대체로 점치는 집을 찾거나 굿거리를 마련한다. 한국인들은 새로 들여온 점보 제트기나 슈퍼 컴퓨터 앞에서도 고사를 지내야 안심한다. 대규모 관급 공사의 기공식에서 해당 부서의 수장(首長)이 돼지머리에 지폐를 얹거나 막걸리를 올리는 광경 역시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무속적이다. 요즈음은 예수를 몸주 귀신으로 모시는 무당들이 등장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들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기독교 공동체에 기꺼이 합류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구성상의 성격과 한국인의 심성이나 문화적 성격 때문에 종교간의 갈등과 알력이 억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심각한 종교 분쟁을 겪어 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이 한국 사회에서는 전혀 염려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과 알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다종교 상황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심리적인 긴장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가정을 비롯해서 학교나 직장 등 모든 단위 사회 속에서 알력과 반목의 요인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국의 종교인들은 누구나 이러한 갈등과 알력에서 비롯되는 불쾌와 불안을 느끼고 있다. 다종교 가정에서 장례 의식 문제로 가족 구성원들끼리 불안을 겪거나 다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다툼은 심각한 가정 불화로 비화되기도 한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갈등과 알력을 분쟁 직전의 수준까지 경험하기도 한다.

불교와 기독교간의 알력 때문에 종종 저질러지는 방화 사건은 어쩌면 조상 대대로 물려 내린 팔만대장경 같은 민족의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단숨에 잿더미로 변해버릴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여러 가지 요인들 때문에 이러한 갈등과 알력이 집단적인 분쟁으로 표출되지 않았을 뿐, 암묵적인 차원에서는 분쟁의 잠재력으로 포진하고 있다. 이러한 잠재력은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가연성(可燃性)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