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하붓다/비교종교

종교간의 대화- 대화의 불가피성

by 자광 2009. 11. 11.
종교인은 물론 종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다종교 사회가 노정하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분쟁의 문제를 결코 방치하거나 도외시할 수 없다.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조상 대대로 물려 내린 세계적 유산을 한 줌의 재로 태워버리도록 놓아둘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하루에도 수 백 명씩 죽이고 죽어야만 하는 지구촌의 현실은 세계 시민에게 결코 남의 문제일 수 없다. 다원주의는 다종교 사회가 노정하는 문제들을 종교간의 대화로써 대처하고자 한다고 했다. 우리는 이제 여기서 종교간의 대화가 갖는 불가피성과 필연성에 대해 이해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종교간에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 첫 번째 분명한 이유는 신앙이 서로 달라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평화로운 공존이야말로 세계 시민이 지켜야 할 절체절명(絶體絶命)의 대전제이다.

평화로운 공존은 분명 대화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이다. 종교간의 심각한 분쟁이 몰고 올 눈에 뻔히 보이는 공멸의 길로 달려갈 수는 없다. 종교인들은 그보다 앞서 아직 남아있는 자제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만큼 인류는 어리석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평화적 공존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상대를 인정하고 대화를 할 수밖에 없다면, 이는 종교 외적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종교적 선택을 하는 꼴이 되는 것은 아닐까? 평화적 공존을 위해서어쩔 수 없이 관용과 대화로 내몰린다면 이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행위 혹은 정치적 행위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는 소극적 태도일 뿐만 아니라 본말이 전도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대화의 궁극적 목적일 수만은 없다.


이는 자기 개방을 기초로 한 열린 종교인으로서의 진리 추구나, 타종교인에 대한 이해나, 그를 통한 상호 변혁과 쇄신의 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평화적 공존이 대화의 궁극적 목적이 되면 대화의 본래 목적들은 희생되고 만다. 배타주의가 타종교를 선험적으로 정죄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면, 평화적 공존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것은 타종교를 선험적으로 인정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평화적 공존이 우선적 목적이 되면 진리의 판단과 실천을 통한 행복 추구라는 종교 본래의 목적은 유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화적 공존도 대화의 분명한 목적일 수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종교간의 대화의 필연적 이유를 종교 자체 안에서 찾아야만 한다.

 대화의 종교 자체적 필연성

다원주의가 추구하는 종교간의 대화의 고민은 자기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헌신하면서도 타종교를 향해 어떻게 동시에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에 임할 수 있느냐는 문제라고 했다. 종교는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 헌신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보면 타종교를 향한 대화의 시도는 전략적 위장이기 쉽다. 열성적 종교인일수록 자신의 신앙을 타종교인에게 관철시키려는 목적으로 대화에 임할 가능성이 높다. 즉, 어떤 종교가 자기 완결성을 고집 하는 한 타종교를 향한 어떠한 대화의 시도도 전략일 수밖에 없다. 이때의 대화의 목적은 설득이나 교화이다.

 
진정한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정직한 자기 개방이 필요하다.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인정해야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자신의 발전 가능성 인정이란 어느 정도의 자기 부정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자기 부정은 정직하고 진지한 종교간의 대화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전제인 것이다. 즉, 전략적인 대화의 목적은 설득이나 교화이지만, 정직하고 진지한 대화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쇄신인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그 본성상 진리에 대한 절대적 자기 독점권을 양보하기 어렵다. 모든 종교는 어느 정도 배타적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종교간의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진다. 그러나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 종교간의 대화를 추구하는 다원주의의 고민이 자신의 신앙에 전적으로 투신하면서 동시에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에 임하는 것이라면, 그 고민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자신의 신앙에 성실하게 헌신하는 것으로써 쉽게 해결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세심한 이해의 과정이 필요하다.

 

불교를 자비의 종교,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만일 자비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불자가 있다면 그는 온전한 불자이고 사랑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기독자가 있다면 그는 온전한 기독자일 것이다.

가장 차원 높은 자비는 "세상 모든 존재를 자신과 한 몸으로 여기라"고 한다. 이는 헌신이라는 타동사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주객의 이론적 분리마저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타자에의 현실적 헌신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말이다.

 

복음서의 가르침 그대로 사랑은 "자신이 해 받고 싶은 그대로 남에게 먼저 해주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이란 타자에 대한 절대적 헌신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자비나 사랑은 누구보다도 먼저 위험하고 불행한 사람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즉, 성실하고 온전한 신앙인에게 있어서 불행한 타자를 향한 헌신은 필연적이다. 사실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다행이다.

 

아직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위험하고 불행하다. 그러므로 성실하고 온전한 신앙인에게 타종교인은 누구보다도 우선적인 헌신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실하고 온전한 불자나 기독자는 반드시 타종교인을 위해 필연적인 헌신을 바쳐야 한다. 그런데도 유독 타종교인에게는 자비나 사랑을 베풀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 성실한 종교인이 아니다.

우리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에 실재하지도 않는 주인공의 희로애락에 공감하여 웃고 울고 성내고 기뻐한다. 타종교인을 위한 헌신은 타종교인을 위한 공감적 이해에서 출발한다.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내가 그 주인공이 된 듯이 느끼는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공감적 이해란 내가 타종교의 신자가 된 듯이 느껴야 하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 없는 헌신이란 있을 수 없다. 만일 공감적 이해도 없이 사랑이나 자비를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결코 사랑이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적 이해 없이는 드라마 한 편도 온전히 볼 수 없다. 사랑이나 자비야말로 진정한 공감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성실하고 온전한 불자나 기독자는 공감적 이해를 가지고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을 추구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사랑이나 자비는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이 전제되며,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은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전제로 하며,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위해서는 정직한 대화가 전제된다. 그러므로 성실한 불자나 기독자는 필연적으로 타종교인과 적극적으로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를 도모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온전한 종교인은 "자신의 신앙에 성실하기 위해서" 반드시 타종교인과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만 하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타종교인과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를 기피하거나 소극적으로 임하는 불자나 기독자는 온전하고 성실한 불자나 기독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화의 종교 자체적 필연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문제는 남는다. 자신의 신앙에 성실하기 위해서 대화에 임한다 하더라도 정직한 자기 개방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배타주의나 포괄주의가 지향하는 개종주의나 성전주의 역시 누구보다도 자신의 신앙에 성실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략적 대화가 아닌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는 "정직한 자기 개방"이란 문제가 새롭게 대두된다. 정직한 자기 개방이란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직한 자기 개방성이야말로 진지한 종교간의 대화에 필요한 결정적 대전제인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는 한국의 다종교 사회는 물론 동서양을 대표하는 종교로서 종교간의 대화에도 주역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제 종교간의 대화에 결정적 대전제가 되는 자기 개방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종교간의 대화에 임하는 이들의 입장을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