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하붓다/허튼소리

꿈(夢)

by 자광 2009. 12. 12.

'꿈'은 일반적으로 잠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환각이라고들 한다.
어떤 사람은 꿈이 없다고 하며,
또 다른 사람은 부분적으로 각성할 때 꿈이 나타난다고 한다.
꿈의 발생은 외적 환경과 신체 내부와의 감각적 자극으로 부터 일어난다.
이 꿈은 거의 시각적인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청각적인 꿈, 미각적인 꿈도 있으며, 날아다니거나 걸어다니는 운동감각적인 꿈도 적지 않다.
꿈속에서 진실을 발견해 창작과 발명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런 꿈이야말로 정말 누구나 꾸고 싶은 것이다.

설혹 그 꿈이 비현실적인 꿈이라 할지라도 꿈을 갖는 것은 일생을 즐겁게 해준다.
이상이나 희망은 꿈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현실화 할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꿈은 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마는 덧없고 싱겁고, 그리고 무상(無常)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중국 촉(蜀)나라에 노생(盧生)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관리로 출세하고 싶어 시험을 치르려고 한단에 왔다.
마침 아침때가 되어서 음식점에 들어가 음식을 시켜 놓고는 그만 피곤하여 잠이 들고 말았다.
그는 누런 밥이 익는 동안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평생 동안의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한다.

또 광릉(廣陵) 땅에 순우분(淳于焚) 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꿈에 괴안국(傀安國)에 들어가 남가(南柯)라는 마을의 수령이 되어
세금을 징수하는 등 충세를 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도가(道家)의 책인 [장자(莊子]에 나온다.

전자를 '한단의 꿈' 후자를 '남가의 꿈'이라고 한다.
노생이나 순우분 모두 꿈에서 깨어나서는 그 꿈이 망상이요, 환각임을 깨닫는다.
우리가 매일 매일 독송하는[금강경]에도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세상 모든 것은一切有爲法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如夢幻泡影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으니 如露亦如電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應作如是觀

이 내용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꿈이나 환각으로 보라는 얘기다.
즉 세계와 우리 인생은 실체가 없는 덧없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한데,
우리는 이를 진실하고 영원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미망의 세계로 부터 각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을 꿈으로 보아야 한다.

옛사람은 꿈에 대해 이렇게 읊었다.

꿈 같은 세상에서 꿈꾸는 꿈을 꾸지 말고
꿈꾸지 않는 꿈을 꿀 줄 알아라.
이러한 꿈이야 말고 참다운 꿈이라고 하겠다.

택암(澤菴) 선사가 말하는 꿈도 이 같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제자들이 죽음에 임박한 택암선사에게 사세송(임종시에 남기는 선사들의 게송)을 청하자,
그는 꿈 한 글자에다 " 옳은 것도 꿈, 그른 것도 꿈,
미륵도 꿈, 관세음도 꿈, 진실로 이렇게 보아야 한다. 고
부처님은 말씀했지."라는 글을 써주고는 이내 입적했다.

이 사세송으로도 알 수 있듯이 택암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세상 일체의 것을 꿈으로 보았다.
꿈이야말로 상대적 인식의 세계를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이니,
선사의 73년 생애가 꿈 한 글자로 응결되고 있는것이다.
그는 일체를 꿈으로 보았으며, 꿈에 철처한 인생을 살았다고 하겠다.

[장자][제물론(齊物論)]에는 장자가 나비가 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장자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희히낙락 즐거워 하며 하늘을 날아다니느라
자기가 꿈에 나비가 된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눈을 뜨고 보니 자기는 다름 아닌 인간 장주(莊周 : 장자의 이름)였던 것이다.
생각건대,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된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자가 깨닫게 된  절대 세계는 꿈이든 현실이든 혹은 나비가 됐든
장주가 됐든 모두가 실재(實在)속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변화일 따름이다.
요컨대 만물은 일체이며 하나라는 것이다.
장자는 꿈속에서 자신을 잊고 나비가 됐다.
이처럼 자신을 잊어버리는 꿈이야말로 선 수행자들이 지향해야 할 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