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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我)/따다부따

검찰의 또 다른 이름 소설가

by 자광 2010. 3. 24.
지금 대한민국은 한명숙 전 총리의 재판에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시쳇말로 전문가가 아닌 일반 국민들이 봐도 당연한 재판을 보면서 너무도 허탈하다. 대한민국 검찰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 구나. 어쩌면 앞으로 검찰 지망생들의 필수코스로 배워야 할 것이 소설쓰기가 아닐까 할 정도로 지금 검찰은 국민들에게 한편의 소설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가진 권력의 힘으로 무소불위의 힘으로 전직 대통령까지 죽음으로 내몰고도 모자라 이젠 전직 국무총리까지 그들의 시나리오에 놓고 그들이 원하는 결과물이 나올 때 까지 소설을 이어 나가려 한다.

소설의 시작은 기억력이 오락가락하는 한사람의 입을 근거로 시작한다. 검찰은 오직 그들이 만들기 시작한 소설을 위하여 기억력에 다소 무리가 되더라도 그들이 가진 권력을 이용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으로 희미한 기억력을 근거로 소설을 일단 쓰기 시작하였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이미 순서를 정해 놓고 그리고 결과물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 기억력이 나쁜 한사람의 노쇠한 노인을 등장시켜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물을 내 놓을 때 까지 기억을 새로 지우고 또 지워가며 시나리오를 만들어 갔다.

그런데 막상 무대에 올라간 배우가 자신이 작성한 그동안 작성한 시나리오를 부정하며 그 시나리오가 강압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작성되어 진 것이라며 다른 시나리오를 소설에 등장시켰다.

이에 당황한 검찰은 자신들이 계획했던 대로 소설이 연결되지 않자 바로 그 장면을 취소한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국민들이 그 부분을 감명 깊게 감상했기에 검찰에게 소설을 그만 작성하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검찰은 포기하지 않고 불과 얼마 전 일도 기억 못하는 노인더러 까마득히 지나간 과거의 기억을 다시 내 놓으라 종용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을 때 까지 소설을 이어 나가려 욕심을 부리고 있다.

다시 소설을 이어가기 시작한 검찰은 또 다른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키지만 번번이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다들 그들이 원하는 소설의 결말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작성하기 시작한 소설에서는 이미 결과물을 정해 놓았는데 자꾸 그 결과물과 다른 등장인물의 이야기에 약간은 부담을 느끼지만 그들은 그들이 가진 힘을 믿기에 두려울 것이 없다.

그들은 이미 과거에 이렇게 해서 그들이 작성한 소설의 결말을 얻은 경험이 충분하기에 그들은 분명 그들이 원하는 결과물을 얻을 때 까지 소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각오를 하고 있다. 즉 그들에게는 책임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에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그들은 그 결과를 정해 놓은 소설을 작성하고 그 소설을 결과에 맞추려 할 뿐이다.

그들의 이미 익숙하다. 힘 있는 자 앞에서는 고개 조아리고 꼬리를 흔들어 얻은 권력을 이용하는 것에 맛 들여져 출세라는 줄에 서서 한치 앞도 모르고 그 줄에 묻어 있는 달콤한 꿀에 취해 그 끝을 모른 채 권력의 힘에 맞추어 소설을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지우고 수정한 소설조차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차피 소설의 결과를 이미 정해 놓았기 때문에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비슷하게 맞추어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난 그 소설을 읽으면서 너무나 엉성한 시나리오에 화가 나고 또 자꾸 바뀌는 줄거리에 소설의 진심이 의심스럽다. 물론 어디까지나 소설이기에 그들 마음대로 바꿀 수도 있지만 어떻게 소설을 출판해 시중에 내어 놓고 중간에 그 소설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며 자꾸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려 한단 말인가.

이미 소설은 잘못 되었다. 지금이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그 소설을 중단해야 한다. 더 이상 그 소설을 이어나가려면 먼저 그들의 이야기에 진심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너무도 황당하게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이야기를 인정하려 하질 않는다. 그들이 맛본 권력의 꿀맛이 너무 달콤한 것일까?

지금이라도 그 기억력 오락가락 이는 노인의 머리에서 출발한 잘못된 소설을 그만 접고 검찰은 소설가가 아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지금도 검찰을 믿고 싶다. 대한민국 검찰이 소설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갑자기 이 생각이 난다. 예전 조중동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가를 아방궁에 비유했던 이야기가. 그때도 그들은 그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순진한 독자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믿고 더불어 욕했지. 마침 그 때 작성하기 시작한 검찰의 소설에 또 다시 순진한 독자들은 그 소설을 믿고 그 안에 등장하는 확인되지 못한 이야기를 사실인 냥 믿기 시작했지. 그리고 그것을 기정사실화하기 시작했지 그 아방궁 기사를 올렸던 신문사들이 생각하는 아방궁의 기준이 무얼까?

유독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만 적용하던 “달러” 원화도 아니고 검찰이 작성한 소설은 유독 그랬다. 그리고 그들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그들에게 자유를 준 주인을 물어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목에 줄을 걸고 말 잘 들으면 달콤한 권력이라는 꿀을 주는 주인의 마음에 드는 소설을 작성해 한없이 꼬리를 흔들며 충성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의 또 다른 이름이 “견찰” 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