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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我)/일상

죽은 자의 도시

by 자광 2009. 4. 5.


지난 4월 2일 가까운 사람이 삶을 버리고 떠났다. 삶이란 참 무심하다. 그는 떠났지만 세상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그저 묵묵하게 또 다른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고 봄이 되고 꽃이 필뿐이다. 그리고 4월 4일 그는 바로 사진에서 보이는 저곳에서 한줌의 재로 돌아갔다. 뜨거운 불 길속에 몸을 맡기고도 아무른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산자의 눈물을 머금고 그렇게 타버린 채 사라져 버렸다. 제법무아 다.


마산에 있는 저곳을 찾은 오전 참 많은 사람들이 저곳에서 검은 옷을 입고 한편으로는 울고 한편에서는 웃고 또 한편에서는 갑작스런 이별에 흐느끼고 있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면서 아 이곳은 산자들 보다 더 죽은 자들이 많은 곳이었다.


산자들의 눈에는 그들은 그저 조용히 누워 있지만 그곳은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산자의 세상이 아닌 죽은 자들의 세상인 것이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무덤들이  나를 빙 둘러 싸고 있었다.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오히려 내가 방문객인 것이다.


삶이 있어 죽음이 있는 것이다. 그곳에 적을 두고 사는 분들은 매일 매일 그렇게 죽음을 직면하고 살고 있다. 그들에게 죽음은 그저 일상일 뿐이다. 처음 죽음을 목격하는 사람들에게는 슬픔이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삶을 영위하는 수단일 뿐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닌 것이다.


죽음 또 다른 이들에게는 삶의 수단인 것이다. 어떤 이의 슬픔이 어떤 이의 삶을 영위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 바로 세상 것이다. 영원한 슬픔도 영원한 사랑도 영원한 고통도 없다. 또 영원한 행복도 없다. 이라는 것도 내가 삶을 주장하기 때문에 죽음 또한 존재 하는 것이다. 죽음도 삶도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는 단지 그렇게 일러 죽음이라 하고 삶이라 주장한다.


죽은 자들의 세상에서 오히려 산자는 보이지 않는 공포의 존재이다. 산자의 세상에서 죽은 자 또한 초대받지 않는 손님처럼 두려운 존재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보이지도 보지도 못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슬픈 이유는 더 상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이 슬픈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와의 이별이 슬프고 더 이상 그와 이야기 하거나 그의 웃음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슬픈 것이다. 그것도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슬플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아무른 말이 없다. 슬프거나 기쁘거나 보고 싶거나 말이 없이 그저 묵묵히 자신의 몸을 불구덩이에 태워도 아픔을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슬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