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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붓다366

공부를 시작하면서 내 주위에 흔히 절에 오래 다니시는 보살님들을 수없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그 분들에게 불교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면 그 분들은 선뜻 대답하시지 못하신다. 그럴진데 불교에 처음 입문하시는 분들에게는 불교의 경전이나 그런 보이는 모습들때문에 어쩌면 상당히 어렵고 다가가기 힘든 무엇쯤으로 각인될 수도 있다. 정말 불교란 무엇일까? 우선 불교라는 용어는 어디서부터 출발을 할까? 불교(佛敎)를 그대로 풀면 부처님을 공부한다는 것이다. 불교라는 용어자체가 일본에 의해 성립이 된 것이기 때문에 불교라는 용어 보다 가급적 불법(佛法)이라는 용어가 더 어울릴지 모른다. 佛敎 란 宗敎 에 기인해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어는 용어 일뿐이니 용어에 걸리지 말고 불법이던 불교 이던 무슨 상관이랴 대중적으로 사용.. 2011. 7. 20.
싯다리타의 정각 붓다의 정각 내용을 가장 초기에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자료는 붓다의 첫 설법인 초전법률(初轉法輪)에 참석했던 5명의 비구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설시(阿說示 A vasit)와 뒷날 붓다의 상수(上首)제자가 된 사리불(舍利弗) 사이에 있었던 대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리불은 그 당시, 왕사성 근방에서 산자야(San jaya)를 스승으로 모시고 친구 목건련과 함께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왕사성 거리에 탁발 나온 아설시 비구를 만났다. 그는 아설시에게 "그대는 누구이며, 스승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진리리[법(法)]을 배웠습니까?" 라고 물었다. 아설시 비구는 "나는 나이가 어리고 집을 떠난 지도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치를 잘 설명할 수 없으니 이제 간략히 요점만 말하겠습니다" 라고 .. 2011. 7. 20.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바퀴통에 연결돼 있어도 비어 있어야 수레가 된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어도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창과 문을 내어 방을 만들어도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그런 고로 사물의 존재는 비어있음으로 쓸모가 있는 것이다. - 서현의 중에서 - 비우는 만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습니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다 잃을 것 같고, 없어지는 것 같아서 불안하겠지만, 그 과정만 지나면 우리는 더 큰 것을 얻을 겁니다. 비움을 통해 더 큰 것을 얻는 하루를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2010. 12. 8.
진정한 보시는 옷감을 짜는 가난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탁발을 하시는 부처님과 마주쳤습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이 실타래 밖에 없습니다.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받아 주십시오.” 실타래를 받아 드신 부처님은 환하게 웃으며 입고 있는 가사를 벗어 들고는, 실타래의 실로 헤진 곳을 꿰매기 시작하셨습니다. 보시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베풀고 받으며, 베풀었다는 마음도 받았다는 마음도 없을 때 진정한 보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0. 11. 29.
심(心) 심(心)은 마음이다. 그런데 마음은 수천수만 가지의 마음이 있다. 어느 마음이 참 마음일까? 아침에 일어나 오늘하루도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마음 아니면 직장에서 혹은 사회에서 부딪힌 일들 때문에 얼굴 붉히며 화내고 있는 마음 어느 마음을 말할까? 여기서의 마음은 텅텅빈 마음이다. 그 마음은 비어 아무것도 있을 리 없는 마음이다. 아무것도 없기에 그 안에는 어떠한 분별망상도 없다. 부처도, 중생도, 깨달음도, 진리도, 참마음도, 거짓마음도 없다. 그런 마음이 바로 무심(無心)인데 무심조차도 거짓이 되는 마음이 바로 심(心)이다. 일체 중생을 바로 이 마음으로 이끄는 것이 심(心)이다. 원래 없는 마음을 모른 채 허상에서 일어나는 망상들이 사실인줄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 망상에서 수만 가지의 신통방통한 현상.. 2010. 11. 27.
그대 어디에 삶(生)이 있나요 삶은 한 번도 그대를 속인 적 없고 삶은 한 번도 그대와 함께 한 적도 없고 삶은 한 번도 그대를 슬프게 하거나 슬퍼하게 한 적도 없으며 삶은 한 번도 그대에게 그대라고 칭하지 않았는데 그대 어떤 삶을 노래하나요. 그대 어떤 삶을 꿈꾸고 있나요. 삶을 주장함으로써 죽음이 존재하는 것을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삶도 죽음도 다 허상이며 무(無)……. 라고. 팔만 사천 경전을 다 뒤져 읽어보아도 어디 한군데 부처를 찾지 않는데 그대는 아직도 삶을 노래하며 삶을 말하는 구려. 어디 내 앞에 그 삶을 내놓아 보십시오. 그대 어디에 '삶(生)' 이 있는지 2010.11.13 자광 하재석 합장 2010. 11. 13.
불교와 타종교와의 대화 자기 완결성을 믿는 종교 기독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십자가로써 상징하고자 한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이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 예수의 몸으로 이 땅에 왔다. 그는 스스로 올라가 매달린 십자가 위에서의 희생을 통해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한다. 모든 인간은 예수의 희생으로써 속량(贖良)받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의 선물로서 주어진 것이다. 선물은 대가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물이란 조건 없이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죄지은 인간에게 징벌 대신에 선물을 준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조건 없이 용서하고 예수의 십자가 희생이라는 한 번 뿐인 유일회적 사건을 통해 구원이라.. 2010. 11. 1.
산사에 오르니 산사에 오르니 바람 한 점 머문다. 발아래 속세는 복잡도 한 듯 한데, 여기가 저기인지 저기가 여기인지. 그렇게 마음은 가져 오질 못했구나. 가파른 산 비탈길 오르다 지쳤는데 맑은 바람 코끝 살짝 스치더니 한 움큼 땀, 말도 없이 스리 슬쩍 훔쳐 가는 구나. 구름만 오락가락. 풍경과 노닥이고 바람 끝에 묻어 있는 중생의 아픔일랑 버려라, 버려라 다 놓아 버려라 두두 물물이 다 부처님의 속삭임처럼. 새들은 무심하게 제각각 지저귀고 나 혼자 중생이라. 오만번뇌 이고진 채, 길없는 길을 찾아 이 산중에 오는구나. 놓을 곳 따로 없고 놓을 것도 없었는데 나 혼자 이고지고 숨조차 헉헉 이며 그렇게 업장처럼 놓지 못해 안달하네. 오늘 느낀 바람 한 점. 그대로가 부처인데 어디서 네가 찾는 부처가 있을소냐. 산사에 .. 2010. 10. 25.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 는[천로금강경주(川老金剛經註)] 외에도 송나라 때 시인 소동파의 시에도 나오는 선 문구이다. 이말은 버들은 푸른 실가지를 드리우고 꽃은 빨갛게 피어난다고 하여 실로 빼어난 봄 경치를 나타내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 경치이며, 전혀 인위적인 것을 가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변치 않는 진실한 모습이다. 버들이 푸르고 꽃이 붉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만일 거꾸로 버들이 붉고 꽃이 푸르다고 하면 이는 거짓된 모습이지, 본래 갖추고 있는 진실한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송나라 때의 고승인 불인요원(佛引了元) 선사와 동림상총(東林常總) 선사에게 선을 배워 대오한 소동파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불변의 진리가 깃들어 있음을 직관하고서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으니, 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 2010. 10. 7.
맑은 바람, 밝은 달 '청풍명월'은 바람은 서늘하고 달 밝다는 뜻으로 월백풍철(月白風淸)이라고도 한다. '청풍'은 가슴까지 서늘한 시원한 바람, '명월'은 깨끗하고 맑게 개인 달로서 '청풍명월'은 티끌만한 오염도 없는 순수청명한 심경, 다시 말해서 번뇌망상을 없앤 무아. 무심의 경지를 비유한 것으로, 불성을 말한다. 또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본래면목(本來面目), 법성(法性)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청풍명월은 선적(禪的)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통속적으로는 '순수한 인간성'이나 '진실한 자기'를 나타낸다. 본래의 순진무구한 불성을 나타내는 청풍명월을 [인천안목(人天眼目)]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명월과 청풍은 멋대로 오고 간다. 청풍은 명월을 배제하고 명월은 청풍을 배제한다." 이말은 무심의 경계로서 자유롭고 무애자.. 2010. 10. 3.
인생은 인생은 언제 부터 나에게 왔나요. 어디서 부터 왔나요. 그리고 어디로 가나요 내것이라고 주장하는 인생은 어디에 있나요 인생이 있다는 것은 내가 있다는 것인데 나는 어디에 있나요. 머리에서 발끝까지 어디 쯤에 내가 있나요.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인연되어진 이 몸뚱아리가 나 인가요. 어디 나를 한번 내어 놔 보세요. 그 인연 흩어지면 어느자리에 내가 있나요. 아서라 말아라 다 부질없는 허상인 것을 긴긴 꿈에서 깨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오고 감도 없는데 어디서 시간으 흘러가고 어디서 인생을 논하고 있을지..... 차 한잔 마시고 길없는 길에서 이렇게 말한다. 無 2010. 9. 25.
태풍이 온단다 지금 내가 있는 사무실은 시장상가 건물이다. 조금은 오래되었지만 지붕들이 잘되어 있어 비가와도 비 맞을 염려는 없다. 하지만 조금 덥다…….하루 종일 에어컨을 켜고 있어야 견딜 수 있을 정도지만 당당히 버티고 있다. 이제 주소도 옮겨야 하고 뭐 이런저런 절차들이 남아 있지만 이 무거운 몸이 꼼짝 하지를 않는다. 움직여야 무언가를 하는데 움직이려 하질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나는 가끔 다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신기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들 제각각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것도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살고 죽고 한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내가 알고 있다는 이 작은 지식보다 내가 보고 듣는 이야기들 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만.. 2010. 8. 10.
말을 조심하라 오로지 말을 조심하라. 함부로 남을 모략하지 말며, 남의 잘못을 전하지 말며,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 말며, 듣지 않은 것을 들었다고 하지 말며,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하지 말라. 악한 말은 자기도 해롭고 남에게도 해를 입힌다. [대장엄론경]중에서 우리 인간이 의외로 가장 많은 죄를 범하는 곳이 바로 입 입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또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들 중에서도 참으로 많은 말 들이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나의 허물을 탓하거나 하는 말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을 할 땐 한번 더 생각해서 하라고 하는 가 봅니다. 그리고 차라리 묵언 수행을 하시는 스님들을 볼 때 말을 함으로 해서 얻어지는 것이 말을 하지 않아 얻어지는 것 보다 더 미미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말이란 칼날 없이 다른 사람의.. 2010. 7. 25.
청소부 마씨네 아들녀석 깨달음의 향기 마조스님은 스님 중 유일하게 속가에서 쓰던 마(馬)씨 성을 그대로 사용했다. 마조 스님이 크게 깨달은 후 세상에 명성이 자자했을 때 하루는 고향에 가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스님을 맞이하였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개울을 건너가는데, 이웃에 살던 한 노파가 와서 보고는 시큰둥하게 내 뱉었다. “떠들썩하길래 누군가 했더니 겨우 청소부 마씨네 아들녀석이구먼!“ 이 말을 들은 마조 스님은 빙긋이 웃으며 시를 읊었다, “권하거니 그대여 고향엘랑 가지 마소 고향에선 누구도 도인일 수 없다네 개울가에 살던 이웃의 그 할머니 아직도 내 옛이름만 부르는구려” 이 일화는 마조 스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깨달은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지 세상을 등진 사람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비범.. 2010. 7. 5.
너는 누구냐 어께를 다친 뒤로 며칠째 아프다. 불편하다. 뭐 그런 감정을 느낀다. 하물며 며칠 동안도 이렇게 불편한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불편할까? 나는 그렇게 평소에는 내 몸이 멀쩡함이 고마움 인 줄 몰랐다. 그렇지만 이렇게 불편해 보면 평소의 멀쩡함이 참으로 고마움인 것이다. 돈이 좀 없고 조금 그래도 몸 멀쩡한 것이 얼마나 다행일까? 두 팔이 두 눈이 두 다리가 멀쩡함이 또 손가락이 발가락이 다 제각각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내 몸 어디 한군데 불필요 한 곳이 없다. 그렇지만 그 또한 무한하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꾸 다르게 변화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윤회한다고 한다. 아침과 점심이 다르고 좀 전과 지금이 다르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내일과 모레가 다르다. 내 몸은 내 마음은 그렇게 매 순간 변화.. 2010. 6.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