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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27

신은 어디에 내 육신의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틈만 나면 산을 오른다. 그곳에서 만나는 수많은 생명들을 보면서 도대체 신은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 궁금해진다. 뜨거운 아스팔트 길 위에 말라 비뜰어져 죽어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지렁이들 과 산 위 의자에서 잠시 쉬려고 하면 덤비는 수십수백 마리의 모기들 그 성가심에 휘둘러는 손길에 죽어나가는 모기. 애꿎게 자기 갈 길 가다가 내 발끝에 밟혀 죽어가는 개미들 그래도 살자고 본능에 따라 내 몸에서 나온 땀의 소금기에서 염분을 취하는 저 검은 나비까지 도대체 어떤 신이 존재하게 했다는 걸까?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보여주는 종교인들의 일탈을 보면 오히려 그들로 인해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들이 말하고 주장하는 신이니 구원이니 하는 것들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증명해주고 있지 않나.. 2018. 7. 19.
피안과 차안 흔히들 종교를 가지는 것이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신앙을 종교를 가지고 앙망하는 신으로부터 그들의 세상으로 가는 것이 구원이거나 극락왕생이거나 뭐 그런 식으로 지금보다 나은 세상으로 가는 것을 열망하고 그러기 위해 간절히 원한다. 이생에서는 비록 비천하고 남루하지만 다음 생에서는 구원받아 지금보다 나은 삶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내가 안을 주장하니까 바깥이 생기는 것이라고 내게서 안이라는 주장이 없다면 바깥이라는 개념도 없다. 내가 극락을 주장하니 지옥이 생기고 내가 이 세상을 주장하니 저세상 또한 생기는 것이다. 보살을 주장하니 중생이 생기고 부처를 주장하니 중생이 생긴다. 보살도, 부처도, 중생도 다 허상이다. 마음에서 생겨난 미련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 2018. 5. 7.
넌 누구 난 어디 내가 있는 지금 여기가 행복하면 극락이요 내가 사는 지금 여기가 괴롭기만 하다면 지옥이다. 극락과 지옥을 따로 어디에서 구하는가 내 사는 이곳이고 내 사는 여기에 苦 와 행복이 더불어 함께 있는데 2016. 8. 31.
구원이 필요하십니까 구원이 필요하십니까. 구원 을 드리겠습니다. 오직 믿기만 하십시요 당신 의 간절한 믿음 만큼 당신은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 독실한 크리스찬 인 친구 가 내 친구 중 한명을 교회 로 인도 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로 인도하고 싶다는 친구는 부처님 께 귀의한 불자 다. 교회로 인도하겠다는 친구가 바로 구원문제를 내민것이다. 즉 니가 믿는 부처님은 구원을 해주질 않는다고 그러자 친구가 그건 니가 걱정안해도 된다고 하지만 친구는 하나님 많이 우리의 죄 를 사해주고 우리의 영혼 을 구원 할 수 있으니 자신따라 교회로 가자는 주장 이다. 내가 슬쩍 끼여들어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야 니가 믿는 신 은 친구가 죽어야만 구원 해주겠지만 나는 그냥 내가 지은죄 내가 갚아 나가며 철처히 반성 하며 .. 2016. 6. 20.
신은 어디에 사람들은 결국 보이는 것만 보고 자신의 기준에 자신의 조건에 맞지 않으면 모른채 외면 하는구나 우리가 흔히 믿는다는 신이라는 존재도 인간에 의해 존재 했다가 인간의 무관심에 점점 쇠퇴 했을 것이다. 세상에 신은 자신 뿐이라며 다른 신 을 믿거나 다른 종교를 믿거나 하면 그 대상이 누구였건 부정해버리는 엄청난 모순을 가진 종교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 사랑조차 자신을 섬긴다는 조건 안에서만 이다. 나의 자존을 허락하지 않고 나의 생각이나 의사 따위는 존중하지 않는 철처한 이기주의 신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 라면서 믿는자와 안믿는자로 세상을 조각내어 반목과 전쟁으로 이끄는 참으로 오만한 종교라는 탈을 쓰고 인간을 쇄뇌 시키는 또 그 말에 현옥되어 그저 자신의 뜻이나 생각보다 신이라는 허상에 매달.. 2014. 4. 5.
(5). 종교간의 대화에 임하는 기본 요건 다종교 사회는 필연적으로 종교간의 갈등과 알력을 낳는다.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종교의 본질적 속성 때문에 종교간의 갈등과 알력은 해소되기 어렵다. 그러나 종교간의 대화는 불가피하고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진정한 종교인은 자신의 신앙에 성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대화의 절대적 전제 조건은 정직한 자기 개방이다. 불교는 정직한 자기 개방에 적극적인 성격을 가졌다. 그래서 불교는 종교간의 대화에 임하는 데에 기독교와 달리 별로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현실의 불교가 종교간의 대화에서 실제로 적극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현실에 소극적인 불자들 자신의 태도 탓도 있으려니와 대화 상대에 대한 신뢰의 상실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이제 논의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여기서 종교간의 대화에 임하는 기본.. 2012. 3. 21.
경주를 다녀오면서 경주를 다녀 오면서 잠시 들린 통도사휴계소 입니다. 경부고속도로 부산방향 마지막 휴계소 입니다. 그곳에서 바라본 영남알프스 산능선들이 참 보기에 좋습니다. 가지산도립공원 이지요 저 품안에 양산시가 있고 저 넘어 밀양이 있습니다. 통도사 휴게소 입니다. 불과 얼마 전 지금의 울산 KTX 역이름에 울산(통도사) 로 결정되었다가 모 종교 단체의 반발로결국 그냥 KTX 울산역이 되었지요. 통도사는 종교 이기 전에 우리의 문화제 인데 말입니다. 자신들의 종교논리를 내세워 결국 무산시키는 그들의 이기주의가 참 무섭습니다. 아이러니 하게 이들 종교 의 교주 이신 하나님은 사랑을 교리로 내세웁니다. 심지이 원수조차 사랑하라 가르칩니다 그런 종교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기주의 적인 종교가 되고 절대로 다른사람의 말을 듣지.. 2012. 2. 28.
변화한다(윤회)한다 인간 군상들은 참 이기적이다. 세상 모든 기준을 인간들의 편리에 의해 결정하기 때문이다. 다른 종의 생리나 불편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아주 지독한 이기주의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구원이라는 맹목 하에 인간 외 또 다른 존재를 기꺼이 만들고 그 존재에 신이라거나 구세주 등등의 이름으로 형상화 하여 자신들의 믿음 혹은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신" 때문에 심지어 전쟁도 서슴치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종교 혹은 신앙이라며 경외 시 한다. 하지만 세상은 어떤 절대자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그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있기 때문인데 이 조건이 바로 인연(因緣)인 것이다. 어떤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것은 조건이 다하면 변화하.. 2012. 1. 24.
고정적 실체를 부정하는 종교 당신은 지금 이 블로그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여기에 적힌 글(문자)을 언제 어디서나 문자 일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불교는 실체적 존재로서의 문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글이란 존재는 사용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글으로 존재한다. 즉, 문자로 이루어진 블로그에 담긴 내용을 "읽고자"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글이 존재한다. 그 문자를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림이다. 그 문자 위에 색깔을 입히면 그것은 색깔있는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글이란 그 글을 보는 사람의 이해도에 따라 글이 아닐 수도 있다. 블로그에 문자로 이루어진 그 무언가가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에 의해서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 글자 자체가 언제나 스스로 의미.. 2011. 11. 20.
방편(方便)으로서의 종교 불교는 종교를 강을 건널 때의 여러 가지 수단 중의 하나쯤으로 여긴다. 배는 강을 건너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다. 강을 가로질러 건너편 언덕에 가 닿는 수단은 여러 가지다. 강은 배를 타고 건널 수도 있지만, 뗏목을 타고 건널 수도 있고, 다리를 놓아 건널 수도 있고, 비행기를 타고 건널 수도 있고, 헤엄을 쳐서 건널 수도 있다. 밧줄을 타고 건널 수도 있고, 심지어 강 밑으로 굴을 뚫어서 건널 수도 있다. 불교는 이들 여러 가지 수단 중의 어느 하나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언뜻 생각하면 비행기로 건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강 하나 건너는 데에 비행기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드는 과도한 방법일 수 있다. 다리로 건너는 것은 안전할지 모르지만 무미건조하게 여겨질 수.. 2011. 11. 20.
세상살이 참 복잡하다 세상살이가 참 복잡하다. 뭐가 그렇게 복잡한지이렇게 저렇게 얽히고설킨 인연들이 너무나 복잡하다. 그냥 다 잊고 살자 하고 놔 버린다. 답답한 가슴으로 먹먹하게 살려고 하지만나는 가만있어도 주변이 복잡해진다. 어찌 되었건 그 원인은 나로부터 내가 있어 존재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tv를 보면서도 차라리 귀를 막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소위 말하면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이젠 정당까지 만들겠다고 나서는 마당이니참 나라꼴 하고는……. 나라 망치는 데는 몇 명 필요 없다고 하더니 딱 그 꼴이다. 이들은 아마도 정말 예수님이 재림해도 예수가 아닌 빨갱이로 몰 사람들이다. 엄연하게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있는 나라에서 그들은 나라를 생각한다면서 나라의 분열을 꿈꾼다. 그들의 논리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소름이.. 2011. 9. 1.
불교와 타종교와의 대화 자기 완결성을 믿는 종교 기독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십자가로써 상징하고자 한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이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 예수의 몸으로 이 땅에 왔다. 그는 스스로 올라가 매달린 십자가 위에서의 희생을 통해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한다. 모든 인간은 예수의 희생으로써 속량(贖良)받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의 선물로서 주어진 것이다. 선물은 대가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물이란 조건 없이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죄지은 인간에게 징벌 대신에 선물을 준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조건 없이 용서하고 예수의 십자가 희생이라는 한 번 뿐인 유일회적 사건을 통해 구원이라.. 2010. 11. 1.
그 놈의 종교 때문에 오늘 사무실 앞에 있는 아구찜 집을 지나가는데 커피한잔 마시라며 자신의 가계로 들어간다. 성의를 거절할 수 없어 들어가 커피를 한잔 마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종교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그분들의 종교는 기독교다 그분들 말로는 예전에 불교였다가 개종하여 지금은 기독교라고 하면서 나 더러 하나님 영접해서 구원받으라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종교이야길 하기 싫어한다. 그놈의 종교 때문에 평소에 잘 지내던 사이가 잘못하면 멀어지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도 친구가 사무실로 찾아와 내게 하나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이야길 시작하기에 내가 그랬던 적이 있다. "친구야 나는 너의 종교를 존중한다. 그러니까 너도 나의 종교를 존중해다오. 우리 더 이상 종교이야기 하지 말자" 라고 그런데 그 친구는 내가 답답하고 한.. 2009. 11. 24.
타종교를 향한 4 가지 태도 다종교 사회가 노정(露呈)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종교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즉,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은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다종교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타종교를 대하는 우리들 자신의 태도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서 종교는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배타적 헌신을 요구하며, 종교인은 본성상 어느 정도 독선적 제국주의의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타인의 신앙을 대하는 종교인의 태도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좀더 자세히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배타주의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2009. 11. 10.
다종교 사회의 필연적 문제 지금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각각 분명한 사회적 영향력으로서 존재하는 다종교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장점과 문제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먼저 다종교 사회는 문화적인 은혜와 기회의 현장이다. 지금까지 축적해 온 인류의 문화 유산 가운데서 종교 문화가 차지하는 양은 압도적이다. 종교 문화가 인류의 삶에 갖는 중요함 또한 결코 작지 않다. 종교는 인간의 탄생과 삶과 죽음은 물론 그 이전과 이후까지 걸치는 인생관과 세계관을 제시한다. 종교는 인간의 모든 가치관을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우리가 만일 단일 종교 사회에 산다면 다양한 종교 문화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박탈당하고 말 것이다. 반면에 다종교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중요한 인류의 문화 유산을 그만큼 폭넓게.. 2009. 1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