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점에서 우리가 다종교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타종교를 대하는 우리들 자신의 태도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서 종교는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배타적 헌신을 요구하며, 종교인은 본성상 어느 정도 독선적 제국주의의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타인의 신앙을 대하는 종교인의 태도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좀더 자세히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배타주의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을 대략 네 가지로 일별해 보고자 한다.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들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서 먼저 배타주의를 들 수 있다. 배타주의는 전통적으로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유일신을 믿어온 종교들이 타종교를 대하는 가장 전형적인 태도이다. 그 중에서 이제 한국 사람들 자신의 일부가 된 기독교가 가장 대표적이다.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이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종교를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진다.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주의적 태도를 갖는 종교인은 자신의 종교만을 유일한 참 종교라고 여긴다. 자신의 종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라면 자신 이외의 것은 모두 허위가 아니면 오류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신앙만이 참이기 때문에 진실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종교는 오직 자기 자신의 종교뿐이다. 즉, 자신의 종교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들은 허위나 오류일 뿐이기 때문에 혹세무민이나 미신의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다. 이 혹세무민이나 미신의 가르침은 척결이나 처단의 대상이다.
그래서 배타주의는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개종시키려는 개종주의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면 처단해버리고 마는 성전주의(聖戰主義)이다. 기독교는 로마 제국주의가 자신들에게 적용했던 가치관을 자신이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뒤 타종교에게 그대로 적용했다. 제국주의는 획일화를 추구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그러나 탈 현대의 포스트모던주의는 획일화를 거부하고 다원가치와 상대주의를 추구한다. 배타주의는 이러한 현대 사조와 평화적 공존이라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전제 앞에서 양식 있는 지성들에 의해 외면 당하고 있다.
포괄주의
한국에도 잘 알려진 대표적 포괄주의자는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이다. 그는 교회 밖에서 비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불자들의 경건함을 어느 정도 인정하되, 그리스도인으로 그것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불자들을 두고 아주 낮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불교의 입장에서 예수를 예수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불자들이 기독자들을 익명의 불자들이라고 부르면서 아주 낮은 단계의 불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포괄주의는 타종교를 결국 자신의 종교로 수렴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다만 포괄주의는 배타주의가 내놓고 휘두르던 칼을 꽃다발 속에 숨겨 지니고 있는 셈이다. 포괄주의는 타종교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자신의 종교가 궁극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즉, 포괄주의 역시 자기 신앙의 완결성을 믿는다. 포괄주의는 어느 정도 개방적 태도를 지향하는 듯하지만 그 개방적 태도는 자기 개방성이 아니라 타종교를 자기 종교로 흡수 통합하고자 하는 전략적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주의
타종교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 포괄주의와 달리 상대주의는 모든 종교의 동등성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인정한다. 독일의 신학자 에른스트 트릴취(Ernst Troeltsch)는 하느님이 서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주었고 동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불교를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 두 종교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포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로 수렴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즉, 상대주의는 참 종교가 동시에 여러 개 있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서로의 신앙을 철저히 인정한다. 그러므로 상대주의는 단연코 개종주의를 배격한다. 타종교인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선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비종교인을 종교인으로 교화시킬 필요는 인정한다. 이는 종교적으로 철두철미한 상호 존중과 평화 공존의 입장을 취한다. 이 상대주의는 매우 지성적이고 양심적이며 자기 개방에 적극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어찌 보면 상대주의 역시 철저한 자기 폐쇄성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자기 신앙에 대해서 철저히 성실하면서 동시에 다른 종교도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자신의 신앙과 타인의 신앙이 동일한 내용임을 확인하기도 전에 서로의 참을 인정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 기만이거나 피상적인 타협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상대주의는 진리 추구에 대한 불성실 혹은 방기(放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참 정도로만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절대적인 헌신을 바칠 수 있을까하는 문제도 생긴다. 상대주의는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을 불가능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정도의 참으로만 여긴다면 그 가르침에 전적으로 헌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상대주의는 서로를 동등하게 인정코자 함으로써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상대주의는 나는 내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갈 터이니 너는 네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가면 그뿐이라는 태도가 된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상대주의적 태도는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일 수밖에 없다.
상대주의는 나는 나대로 행복하니 너는 너대로 알아서 행복하라는 태도이다. 즉, 상대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적극적 애정을 갖지 않는다. 배타주의나 포괄주의가 개종주의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상대주의는 자기 만족에 안주하여 개종의 의지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상대주의 역시 자기 폐쇄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원주의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다수의 종교를 참으로 인정한다. 특히 다원주의는 적극적으로 다수의 참 종교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이름을 얻었다. 그렇다면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상대주의가 진리 추구의 방기(放棄)와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일 수밖에 없다면, 다원주의는 결코 이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첫째, 다원주의는 진리를 향해 진지하고 정직한 자기 개방을 추구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의 주장에 폐쇄적으로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자기 완전성에 갇혀 있지도 않는다. 다만 자기 완전성을 잠정적으로만 주장함으로써 자기 쇄신과 자기 발전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고자 하는 것이다. 흔히 말해 다원주의는 열린 종교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둘째, 다원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진지한 이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즉,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진지한 공감과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헌신하면서도 타종교를 향해 어떻게 진지하게 열려 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체험에 기초하며 본질적으로 배타적 속성을 갖는 타자의 신앙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다원주의자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바로 다름 아닌 대화이다. 다원주의자들은 대화라는 방법이 그러한 목적을 성취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상대주의는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원주의만이 진리 추구와 타종교의 이해를 위해 대화를 추구한다.
다원주의는 진리에 대한 정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이해와 쇄신을 도모한다.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해서 타자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즉,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한 상호 변혁과 쇄신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상호 변혁과 쇄신의 끝에서 서로가 다같이 공유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