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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붓다/차나한잔

모릅니다

by 자광 2009. 10. 27.
불식(不識 : 모릅니다)은 선의 창시자인 달마 대사가 양나라 무제와 문답하면서 쓴 선의 명구이다.
이 '모른다'와 함께 '공덕이 없다'(無功德)''텅비어 아무른 성스러운 것이 없다' 라고 하는 선구도 대단히 유명하다.

달마는 선(禪)을 전하기 위해 바닷길로 3년이나 걸려 양나라 보통(普通) 7년(526년)에 중국 광주(廣州)에 두착했다.
당시 그는 130여 세의 고령이었다고 한다. 불심왕자(佛心王子)로 까지 존경받을 정도로 불법에 깊이 귀의하고 있던
무제는 멀리서 온 달마를 금릉(金陵)으로 초대해 이렇게 물었다.

"불법의 근본 뜻은 무엇입니까?"
"텅비어 아무른 성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무제는 달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다시 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모릅니다."



무제는 달마가 답한 이 한마디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불식은 일반적으로 '알지못한다'는 뜻이지만 선문에서 쓰는 의미는 꼭 그것만은 아니다.
불식에는 깊은 의미가 있으니, 달마의 마음이 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소위 '사고가 미치지 못하고 말 길이 끊어진' 세계다.
달마는 집착과 분별에 의해 성인과 범부, 유(有)와 무(無)의 대립적 사고를 하고 있는 무제의 관념을
없애기 위해 '불식'이라고 말한 것이다.

불식(不識)은 알고 모름의 분별의식을 초월한 고차원적의 불식이다.
그래서 양쪽의 상대적 인식을 없애야 하는것이다.
알고 모름의 분별을 하지 않고 완전히 버릴 때 비로소 불식을 이해하게 된다.
상대적 세계에만 머무르고,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한 불식을 이해하기란 붉능하다.

무제는 이 같은 대립적인 분별의식에 머물러 그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인 세계를 초월해
절대의 세계에 서 있는 달마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불식'의 공안 역시 수행 체험에 의해서만 이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쉬운 선어는 아니다.
다도(茶道)에서도'불식'을 사용한다. 불식암(不識唵), 불식헌(不識軒), 불식재(不識齋), 등을 호(號)로 쓰고 있으며
'불식'이란 이름을 붙인 다기(茶器)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