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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붓다/비교종교

불교와 타종교와의 대화

by 자광 2010. 11. 1.
자기 완결성을 믿는 종교

기독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십자가로써 상징하고자 한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이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 예수의 몸으로 이 땅에 왔다. 그는 스스로 올라가 매달린 십자가 위에서의 희생을 통해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한다. 모든 인간은 예수의 희생으로써 속량(贖良)받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의 선물로서 주어진 것이다. 선물은 대가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물이란 조건 없이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죄지은 인간에게 징벌 대신에 선물을 준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조건 없이 용서하고 예수의 십자가 희생이라는 한 번 뿐인 유일회적 사건을 통해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죄지은 인간에게 징벌 대신에 무조건적인 선물을 주는 구원 사업을 펼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구세주, 즉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예수는 구원의 절대 전제이다. 예수 없이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구세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희생적 은총 없이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구원의 절대 조건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구원의 완결 조건이다. 구원은 선물이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미 인간에게 주어졌다.

구원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미 완결되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일, 즉 십자가 사건을 구원 사건으로 수납하는 일뿐이다. 이제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외의 어떠한 구원 행위도 더 이상 필요 없다. 단 한 번의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은 온전히 완결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한 분뿐인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결코 부정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서 구원은 결코 논의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구원 조건을 논할 필요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절대 조건이며 완결 조건인 것이다.

우리는 앞서 진지한 대화를 위해서는 전략이 아닌 정직한 자기 개방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그리고 정직한 자기 개방이란 일종의 자기 부정, 즉 자기 완결성의 부정이라고 했다. 자기 개방으로 열려 있지 않는 한, 즉 자기 완성을 주장하는 폐쇄주의에 갇혀 있는 한, 정직한 대화란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간의 대화에 임하는 기독교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대체로 개종주의나 성전주의를 견지해 왔다. 이러한 태도는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만일 개종주의자가 대화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전략적 기만이기 쉽다.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독점권, 즉 기독교의 절대성과 완결성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전략적 대화가 아닌 정직하고 진지한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진실로 가능할까? 요즈음 이에 대한 심각한 논의가 기독교 신학자들 사이에서 분분하게 진행중이다. 정직하고 진지한 대화의 시도는 기독교로서는 자기 완결성을 포기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의 불가피성과 필연성에 대한 요청이 요즈음 지성적 기독자들 사이에서 강하게 일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자기 초월을 지향하는 종교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정직하고 진지한 대화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는 유리한 입지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불교는 대화의 절대적 전제 조건이랄 수 있는 자기 부정의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 전통에서 찾기 어려운 독특한 자기 초월적 부정의 전통이 있다.

불교는 종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불교는 종교를 하나의 수단으로 여긴다. 예를 들자면, 불교는 자신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쯤으로 여긴다. 손가락은 달이 아니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 수단일 뿐이다. 목표하는 바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이다. 달이야말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해탈이다. 그런데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는 수단인 줄 모르고 손가락을 달로 여긴다면 이는 수단을 목적으로 잘못 아는 것이 된다.

달을 찾기 위해서는 손가락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시선을 계속 손가락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달을 보기 위해서는 손가락에서 눈을 떼야 한다. 손가락은 결국 부정되어야만 할 무엇이다. 불교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여긴다는 것은 자기 초월을 위한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끝까지 손가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만일 손가락을 목적으로 알고 끝까지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손가락의 노예가 되어 달을 보지 못하고 말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종교를 수단으로 알지 못하고 목적으로 여겨 집착하는 행위를 두고 종교를 사물화(事物化 ; reification)시킨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영웅의 역할을 맡았던 배우를 만나면 시청자들은 그를 실제의 영웅으로 착각하고 동경한다. 반대로 악역을 맡았던 배우를 만나면 그를 실제의 악인으로 여기고 비난하거나 심지어 해치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배우는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 도구요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시청자들은 도구나 수단일 뿐인 그 배우를 실재하는 인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두고 사물화의 과정, 혹은 우상화(偶像化)의 과정이라고 한다. 종교 역시 이렇게 되기 쉽다.
 
불교는 모든 종교를 진리를 가리키는 수단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진리를 가리키는 수단에 불과한 종교를 진리 자체인 줄로 안다면 이는 종교를 사물화시키는 것이다. 종교를 사물화시키게 되면 종교에 집착하고 종교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임시적이고 상대적인 것을 영원하거나 혹은 절대적인 것으로 잘못 알고 집착하는 것을 우상화라고 한다. 경전은 진리를 가리키는 수단이다. 그러한 경전을 절대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을 만드는 것이다.

불교는 이 우상화나 사물화의 과정을 철저하게 경계한다. 그래서 중국 선불교 전통의 정점에 섰던 임제선사는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고 갈파했다. 이는 사물화된 붓다나 조사에 대한 철저한 타파를 의미한다. 그는 붓다나 조사 역시 자신의 깨달음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나 조사를 절대시함으로써 그것에 집착하고 노예가 되는 것을 질타하는 것이다. 불교는 자신이 진리로 여기는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불교는 진리에 집착하는 것을 법집(法執)이라고 하여 타파하고자 한다. 이처럼 불교는 자신을 부정하고 초월하는 데에 익숙하다. 불교는 이러한 자기 초월적 부정을 통해서 진리에로의 향상을 기도하는 것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하느님을 만나면 하느님을 죽이고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여라"는 자기 부정이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 그 자체이므로 절대 부정될 수 없다. 붓다는 자신을 진리가 아니라 진리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여긴다. 불교는 이처럼 자기 부정을 통한 자기 개방에 철저함으로써 정직하고 진지한 종교간의 대화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