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탄생
석가모니 부처님은 기원전 624년 경 북인도 석가족의 수도인
카필라바스투에서 태어났다. 슛도다나 왕(정반왕)과
마야 왕비 의 태자로서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했던
그날은 4월 8일(음력)이었다.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로 태어나자 마자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 한손은하늘을 가리키고 한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라 말했다고 전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維我獨尊) 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 곧 중생(衆生)이며
모든 생명체들은 각각 보배로운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는 존귀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또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黨安之)는 '모든 세상이 다 고통속에 잠겨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는 중생 구제에 대한 서원을 담고 있다.
싯다르타 태자는 태어난 지 7일 만에 마야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이모였던 마하파자파티 에의해 양육되었다.
싯다르타의 탄생에 관한 유명한 전설 중 하나는 아시타 라는 선인(仙人)의 예언이다.
그 당시 인도인 들은 어린 아이가 태어난 날 별자리에 따라 길흉을 점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에 따라 슛도다나 왕도 점성술의 대가를 궁전으로 불러서 아이의 장래를 점치게 되었다.
그때, 아시타 선인은 태자가 장차 위대한 전륜성왕이 되거나, 부처가 되어서 가르침을
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2. 성장과 결혼
증지부(增支部) 경전에서는 석가모니의 회상을 빌어서, 그의 성장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세심하게 양육되었다. 매우 세심하게 양육되었고,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세심하게 양육되었다. 내 아버지의 거처에는 연꽃의 못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하나는 푸른 연꽃의 못이고, 또 하나는 붉은 연꽃의 못이며, 다른 하나는 하얀 연꽃의
못이었는데, 이것들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
카시에서 산출된 최상품의 천으로 내 두건을 만들었고, 카시산(産)으로 내 상의와
속옷과 외투를. 나에게는 세개의 궁전이 있었다. 겨울에 지낼 곳과 여름에 지낼 곳과
우기(雨期)에 지낼 곳이었다. 비구들이여, 우기의 궁전에서는 비가 내리는 넉달 동안
오직 여성 악사들에게 둘러 싸여 즐기면서 나는 궁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호사를 누리던 태자는 점차로 명상에 빠져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자 부왕은 태자의 장래를 염려하여, 그를 결혼시키기로 마음 결정했다.
경전에 따르면, 싯다르타 태자는 사촌동생 데바닷타 등과 뭉예를 겨룬 뒤, 승리자 가
됨으로써 야쇼다라를 아내로 맞이했다고 전한다.
그때 태자 나이 19세 였다.
태자와 야쇼다라 사이에 아들 라훌라('장애"라는 뜻)가 태어났으나, 그는 새로운
인생길을 선택한다. 출가 수행자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문출가상
3. 출가
드디어 싯다르타 태자의 나이 29세 때 사랑하는 가족과 부귀 영화, 모든것을 버리고 출가
수행자의 길로 떠난다.
경전에서는 태자가 출가하던 때를 인상 깊게 묘사하고 있다.환락이 충만했던 연회의 밤,
홀로 깨어난 싯타르타는 마부인 찬나와 함께 백마 칸타카를
타고 성문 밖으로 나갔다.
새벽녘에 카필라바스투에서 멀리 떨어진 아노마 강 건너에 이르자, 태자는 자신의 몸을
장식했던 보석들을 찬나에게 준 뒤에 부왕과 가족에게 출가 사실을 전하라고 말한 뒤,
떠나 보낸다.
홀로 숲속에 남은 싯다르타 태자는 자신의 몸을 감싼 비단옷 마저도 지나가는 사냥꾼과
바꿔 입은 뒤, 드디어 수행자로서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4.수도생활
수행자의 길을 선택한 태자의 첫 스승은 알라라 칼라마라는 선인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가르침을 모두 전수받고 그곁을 떠나게 된다.
알라라 칼라마가 가르쳐 준 경지는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이르는 것이다.
무소유처란 무색계의 4처 중 세번째로, 선정(禪定)에 힘써 무소유의 알음알이를
터득하고 무소유를 행함으로써 이르는 경지를 말한다.
그 다음에는 웃다카 라마풋다 라는 스승에게 보다 더 높은 경지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그 경지에도 만족하지 못했던 태자는 그 스승에게서도 떠나고 만다.
웃다카라마풋다에게 배운 경지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였다고 전한다.
비상비비상처란 무색계 4천 중 가장 마지막 단계로 비유상비비상처(非有想非非想處)
라고도 한다.
3계의 가장 높은 경지에 있어 생각이 없으므로 비상(非想) 또는 비유상(非有想)이라
하며, 그러면서도 자세한 생각이 없지는 않으므로 비비상(非非想)또는 비무상(非無想)
이라 한다.
그러나 싯다르타 는 새로운 경지, 더 높은 깨달음을 추구하며 길을 떠나 네란자라 강
근처의 우루벨라 마을에 이르렀다.
우루벨라의 숲에서 수많은 고행자들이 수도하고 있었는데, 그들과 함께 새로운 수행을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고행의 길. 그로 부터 6년에 걸친 극심한 고행이 시작되었다.
5. 성도
싯다르타는 6년동안 고행을 통해서도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고행을 통해서는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음식을 섭취하기로
마음 먹었다.
때 마침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에 살던 수자타라는 처녀가 싯다르타에게 우유죽 공양을바쳤다.
싯다르타가 우유죽을 받아 먹는것을 보던 동료 고행자 다섯명은 그가 고행을 포기 했다고
여기며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우유죽을 먹고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싯다르타의 마음에는 새로운 경지가 열리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고행도, 극단적인 환락도 아닌 정녕 중도(中道)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깊은 명상에 잠겨 있던 싯다르타는 더 없이 높고
평등한 진리를 깨치게 된다. 태자나이 35세 때 12월 8일의 일이다. 깨달음을 성취한 싯다르타는
그 순간 붓다, 즉 부처가 되었고, 그 후 부터 뭇 생명의 구제자로서 존경받는
스승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가 깨달음을 얻었던 장소는 지금도 붓다가야로 불리며,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리고 있다.
6. 전법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칠 것인지 망설이고 있을 때,
브라마 신이 나타나 중생구제를 위해서 가르침을 펴기를 권했다는 이야기가 경전에 전한다.
이 일화는 '범천(梵天)권청(勸請)'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인데, 그 진위에 대해
확인할 길은 없으나,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은 때로 부터 7주일 동안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거처를 옮겨 가면서 보다 깊은 명상 속에서 깨달음을 음미했다고 경전 곳곳에서 전하고 있다.
마침내 법을 전수하기로 결정한 석가모니는 함께 고행을 닦았던 다섯명의 비구에게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이를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아야교진요, 아설시, 마하남, 바제, 바수 등의
다섯비구는 석가모니의 첫 제자로서 유명하다.
전법에 나선 석가모니는 야사와 그의 친구 50여 명의 무리를 출가시켰으며, 녹야원을 떠나
마가다국으로 가는 길에서는 30명의 젋은이들을 교화시켜 제자로 받아들였다. 또 가장 큰 제자가 된,
마가다국 니련선하에 살던 가섭 3형제와 그들의 제자 1천명을 제자로 삼고,
사리불의 제자 1백명과 목건련의 제자 1백명을 귀의 시킴으로써 초기 불교교단을 완성하게 된다.
그 후로 쉼없이 전도 여행을 다니며 수많은 제자에게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 보였고,
그들 또한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자신의 삶 전부를 바쳤다.
7. 입멸
12연기(緣起), 중도(中道), 4제(諸)등의 기본 교설을 비롯하여 최상의 진리를 아낌없이 설하던
석가모니의 전법 생활 45년, 그의 나이 80세 때 입멸을 앞두고 마지막 가르침을 전한다.
"아난다여, 너 자신을 너의 등불로 삼고, 또 그누구도 아닌 너 자신을 너의 의지처로 삼아라. 그 밖의
어느것도 너의 의지처가 아니다." 이를 요약하면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 한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석가모니의 유훈(遺訓)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바로 그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증명해 보인 것이 그가 설한 진리였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말하겠다. 조건지워진 모든것은 무상(無常:변하지 않는곳이 없음)
하다. 그대들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노력하라."
석가모니의 마지막 당부의 말이다. 기원전 543년 2월 15일, 그는 열반에 들었다.
1주일 후 그의 시신은 쿠쉬나라에서 말라(Malla)족에 의해 화장(火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