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깨달음에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많은 경전들이 다. 오직 그 깨달음으로 이어져 있다. 팔만사천법문이란 그때그때 모인 대중들의 근기에 맞추어져 있다. 지금 세상은 어느 한부분만을 가지고 이것이 부처님의 진실한 법이다.
이 법만이 성불할 수 있는 경전이라고 주장하는 단체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옴마니반메훔, 묘법연화경, 등등이 그 예이다 어떻게 옴마니반메훔 만이 성불할 수 있는 길이겠는가 물론 그길로 가도 도착점은 같다.
열심히 옴마니반메홈 을 외우고 익혀서 성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옴마니반메훔 도 수단 일 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8만 4천 법문 모두가 수단 일 뿐이다. 즉 강을 건너기 위한 나룻배 일뿐이다. 결국에는 버려야 할 것들이다.
그럼 무엇을 믿어야 할까. 바로 자기 자신과 진리다. 어둠과 밝음이 따로 둘이 아니듯이 자신과 부처가 따로 둘이 아님을 믿는 것이다. 의심하자 않는 것이다. 내가 과연 부처가 될 수 있을까 과연 진리란 존재 할까. 등등 의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이다.
금강경을 외우든 천수경을 외우든 화엄경을 외우든 아니 그 경전들을 다 읽고 쓰고 한다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걸리적 일 뿐 아무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지 수단일 뿐인 것이 매달려 세월만 허송할 뿐이다. 주격이 전도 되는 것이다.
교리를 열심히 외우고 익힘도 중요하고 경전을 달달 외우고 씀도 중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자신을 바로 봄이다. 지금 이글을 보고 있는 순간의 그대만이 오롯이 참 자기 인 것이다. 순간순간 깨어 늘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다면 이미 생사를 넘나 들 수 있다.
늙음도 죽음도 없다. 더럽고 깨끗할 것도 없다. 늘 깨어 있는 자아를 발견한다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존재 한다.
물은 물로 산은 산으로 그곳이 있을 뿐이다.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산이 있는데 높은 산이 있고 보기 좋은 산이 있을 필요는 없다. 그냥 산이 있을 뿐이다. 분별망상이 없는 마음에 무슨 좋고 나쁘고. 선하고 착하고 가 있겠는가. 그러니 이제 무엇을 믿겠는가.…….
이 법만이 성불할 수 있는 경전이라고 주장하는 단체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옴마니반메훔, 묘법연화경, 등등이 그 예이다 어떻게 옴마니반메훔 만이 성불할 수 있는 길이겠는가 물론 그길로 가도 도착점은 같다.
열심히 옴마니반메홈 을 외우고 익혀서 성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옴마니반메훔 도 수단 일 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8만 4천 법문 모두가 수단 일 뿐이다. 즉 강을 건너기 위한 나룻배 일뿐이다. 결국에는 버려야 할 것들이다.
그럼 무엇을 믿어야 할까. 바로 자기 자신과 진리다. 어둠과 밝음이 따로 둘이 아니듯이 자신과 부처가 따로 둘이 아님을 믿는 것이다. 의심하자 않는 것이다. 내가 과연 부처가 될 수 있을까 과연 진리란 존재 할까. 등등 의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이다.
금강경을 외우든 천수경을 외우든 화엄경을 외우든 아니 그 경전들을 다 읽고 쓰고 한다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걸리적 일 뿐 아무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지 수단일 뿐인 것이 매달려 세월만 허송할 뿐이다. 주격이 전도 되는 것이다.
교리를 열심히 외우고 익힘도 중요하고 경전을 달달 외우고 씀도 중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자신을 바로 봄이다. 지금 이글을 보고 있는 순간의 그대만이 오롯이 참 자기 인 것이다. 순간순간 깨어 늘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다면 이미 생사를 넘나 들 수 있다.
늙음도 죽음도 없다. 더럽고 깨끗할 것도 없다. 늘 깨어 있는 자아를 발견한다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존재 한다.
물은 물로 산은 산으로 그곳이 있을 뿐이다.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산이 있는데 높은 산이 있고 보기 좋은 산이 있을 필요는 없다. 그냥 산이 있을 뿐이다. 분별망상이 없는 마음에 무슨 좋고 나쁘고. 선하고 착하고 가 있겠는가. 그러니 이제 무엇을 믿겠는가.…….